2009년 2월 12일 목요일

사물놀이란 무엇인가?

사물놀이가 탄생한지도 어언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간 사물놀이는 국악의 새로운 장르로써 전통예술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시도로서 인정되었고 국악의 여타부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국악에 대한 인식수준에 불꽃이 일게 했으며 또한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20여년의 역사 만큼이나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전문인들, 실기인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사물놀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풍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사물놀이의 전체적인 모습들을 조망하면서 그 현재와 미래 또한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정상적인 발전과정을 밟지 못하고 왜곡된 우리문화를 옳은 흐름 속에 되돌려 놓는 일,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는 일, 선배들이 창조한 음악적 성과를 이어받아 더욱 확대,융성시키는 일, 나아가 우리의 민족전통예술의 위대한 영광을 우리시대에 재현하는 것까지.......


길은 멀고 험난할 지언정 우리시대의 잽이들은 이를 기꺼이 받아안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풍물굿의 기원을 우리는 뿌리부터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흔히 풍물굿을 대충 조선시대쯤에 행해졌던 놀이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풍물굿의 근본정신을 무시하는 견해입니다.

우리조상들은 험난한 자연환경을 이겨나가기 위해 하늘과 소통하는 방식으로써 제천의식을 행했습니다. 그 내용은 풍농과 안택을 기원하는 것으로써 여기에는 온갖 예술형태가 뒤따랐을 것입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과 후한서 동이전(後漢書 東夷傳)에 보면,


오월 씨뿌리기를 다하면 귀신을 섬긴다. 뭇사람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이 쉬임이 없다. 그 춤은 수십인이 함께 일어서고 서로 따른다. 땅을 밟기도 하고 낮게 치솟기도 하며 손과 발을 서로 상응하게 한다. 절주는 탁무와 흡사함이 있다. 시월에 농사를 마치면 이와 같이 되풀이 하였다.


위와 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최초의 시가로 알려진 '구지가'에 보면 거북이를 땅 밖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한 무리의 장정들이 군무를 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그들에게는 처절했겠지만)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속에서 풍물의 원시적 형태가 같이 행해졌을 것입니다(춤추고, 두드리고, 노래하고 하는). 이것이 불교와의 만남 (삼색띠, 걸립), 풍농안택기원(두레와의 관계), 그리고 군악적인 요소와 어우러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풍물굿의 변화(혹은 진화)과정을 이보형 교수가 정식화 시킨바 풍물굿이 축원 - 노작 - 걸립 - 연예의 형태로 발전되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 삼국시대 ~ 조선시대 이전까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풍물굿이 부족, 혹은 씨족의 제의식과 맞물려 원시적 축원의식의 모습으로 행해졌습니다. 수렵의 신호음, 혹은 노동의 리듬을 표현하는 방식으로부터 점차로 일종의 타악의 형태로 이전했을 것으로 보이며 악기의 재료로 볼 때 북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철기시대를 필요로 하는 꽹과리나 징이 그 다음으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나. 조선중기 이후 ~ 말기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두레'의 개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수도작을 해야하는 특성상 조선시대 전반을 통틀어 (실제로 공동 노동조직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영조실록을 보면 두레풍장에 대해 '이미 이것을 백년민속이어서 금하기가 어렵다'라고 아뢰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두레이전에 삼국시대 이후 계속되어져온 공동노동조직과 특유의 민속문화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두레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실제로 농사과정에서 두레풍장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생산력 증대의 측면에서 두레와 긴밀하게 결합되었고 한편으로 세시 풍속과의 연관 속에서 계속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19세기는 조선사회가 급격히 해체, 재편성되는 시기입니다. 양난(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인해 신분제가 조금씩 뒤흔들리는가 하면 이앙법이 들어오면서 농업 생산력에서의 혁신이 일어나고, 화폐경제가 발전됩니다. 또한 근대적인 서구의 문물이 서서히 유입되어 봉건적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총체적 변화입니다.


특히 이앙법의 도입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농촌사회의 계층을 분화시켜 최초로 전문예인집단이 생겨납니다. '남사당패'는 대표적인 전문예인집단으로써 두레에 연관되어 있던 풍물굿이 하나의 완결된 예술로써 정립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판굿'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탄생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격동적인 사회의 변화 속에서 풍물굿은 여타의 영역과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지금의 풍물의 모습이 갖춰지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습니다.


불교와의 연관은 고깔, 삼색띠 등의 의상뿐만 아니라 걸립이라는 형태를 풍물에 부여했습니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말미암은 재정의 궁핍으로 불가에서는 화관을 쓰고 꽹과리, 징, 장구, 북, 자바라, 笛(적)등의 악기를 듣고 마을을 찾아 다니며 걸립을 하던 굿중패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풍물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군사적인 부문에서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진법'과 활달한 동작, 그리고 전립(상모의 前身) 등의 영향을 받게 되며 농업생산 문화와의 연관을 세시풍속, 두레굿, 혹은 마을굿의 모습으로 풍물과 연관을 맺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풍물굿이 여타의 부분에 속해서 존재하다가 하나의 독립된 예술형태로 종합적인 발전의 길을 열었다는데 있습니다.


다. 일제시대 ~ 해방공간, 유신시대까지


일제시대는 민족예술의 암흑기로 명명됩니다. 식민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했으며 종국에는 합방이라는 극단적인 비극이 민족에게 닥칩니다. 더구나 그들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민족 예술,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합니다. 일제의 침략을 두 가지의 형태로 진행되는 바,


첫째 : 문화자체를 말살하였습니다. 일제는 공동노동을 통해 협동과 협화를 이루는 풍물을 철저하게 탄압하였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예도 있고 하기에 그들은 실제 농사짓기에 필요하지 않으면 풍물굿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류상으로 '농악'이라 표기하지 않으면 불허했으며 이 때문에 '농악'이란 말이 생겨났다고도 합니다. 또한 동아시아 침략전쟁 때는 탄환을 만들기 위해 꽹과리, 징 등을 공출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의 원형질 그 자체인 '신명'을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풍물놀이의 역동성, 공동체성,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을 본 그들은 그러한 '신명'의 무서운 생명력을 두려워하여 더욱더 풍물과 민족예술 전반을 억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둘째 : 왜색문화가 들어 왔습니다. 영화(서편제)에는 그 장면이 매우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소리꾼들의 마당을 소위 '유랑극단'이 점거해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문물들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풍물굿의 공간자체가 축소되어 버리고 이제 풍물굿은 소위 근대적인 문화들 (영화, 신극, 신문학, 축음기) 등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가야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문화통치시기에 일제는 농악경연대회를 수없이 개최합니다. 그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건 간에 이는 전국의 풍물잽이들을 한군데로 모으는 효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풍물굿이 고립적인 발전형태에서 교류와 비교검토, 그리고 장점을 수용하는데 이르러서 전국적인 형태로 진화하기에 이릅니다.


전사섭 선생이 '협률사 설장고의 신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능했을 것이며 교통의 발달은 각 지역의 풍물굿이 교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상모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더욱 더 가속화 되었으리라 봅니다. 해방공간 속에서 때로는 희생양이 도기도 하고, 때로는 휩쓸리기도 하며 근근히 이어가다 풍물굿은 미군정시대와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를 통과합니다.


미군정시대에는 일제시대보다도 더한 문화적 충격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저질 대중문화가 침투해 들어오고 그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무차별적으로 한반도를 유린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의 풍물굿은 그나마 양적으로 쇠퇴한 반면 미군정 이후로는 질적으로 문화적 형태들이 변화해나가기 때문에 이때야말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더구나 새마을운동과 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시대에는 근대화의 허울아래 우리의 것은 '촌스러운 것, 비과학적인 것, 깨뜨려버려야 할 구시대적인 것'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풍물굿 역시 미신으로 낙인찍혀 금지되는 등 커다란 시련을 맞습니다.


라. 70년대 ~ 현재


70년대 초반에 서울대에서 시작된 탈춤부흥운동은 우리 민족예술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사건입니다. 이 흐름은 급속도로 호응을 얻고 지지를 받으며 곧 맹렬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각지에 전승되고 있는 전통예술들이 발굴되고 전수되었고, 그 동안 천대받던 우리 굿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까지 집중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복고적인 취향이 아니라 주체성 없이 외래문화에 휘둘리던 우리자신을 이제는 되찾아야겠다는 맹렬한 의욕이었던 것입니다.


풍물 역시 이 흐름에 힘을 받아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각 대학에서 풍물패가 생겨나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직장인, 주부, 애호가들 할 것 없이 펴져 나간 풍물인구의 저변확대는 군대나 각 지역의 사회교육단체, 주민풍물패, 노동운동계 등으로 그 기반을 넓혀나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사물놀이는 그렇지 않아도 고조되어 가고 있던 풍물굿에 대한 관심을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뇌관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부문에서, 혹은 다른 바탕 위에서 우리시대의 풍물굿을 일구어 나가고 있으며 이러한 속에서 새로운 풍물굿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애호가이건, 전문인이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수많은 난관과 시련을 거치면서도 풍물굿은 과거를 종합하고, 현재를 다지며 미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어느 민족도 가져보지 못한 독특하고도 우수한 예술형태인 풍물굿은 우리민족의 정수인 `굿정신`을 앞으로도 계속 융성, 발전 시켜나갈 것입니다.

사물놀이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술한 기나긴 과정의 산물입니다. 풍물굿의 현대화된 일 형태로써, 혹은 풍물굿계승의 한 갈래이면서, 발전전망으로써의 사물놀이의 역할은 대단히 크다 하겠습니다. 사물놀이는 어떻게 생성되었을까요?

이야기는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외래문화의 침입과 유신의 광풍 속에서 풍물굿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 풍물굿이 미신으로 배척받고 민족고유의 '굿정신'이 한낱 푸닥거리고 천시 당하던 시기에 사물놀이의 역사는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5살때부터 남사당에 들어가 양도일선생, 남운용선생, 송순갑 선생으로부터 온갖 기예를 사사 받은 김덕수. 남운용 행중에서 최성구, 양도일선생 등으로부터 기예를 배운 김용배. 역시 남사당에서 김복섭스님, 이성호 선생으로부터 비나리를 전수받은 이광수. 삼천포 지역에서 당대의 소고잡이로 인정받고 있던 최종실. 이들의 만남은 사물놀이의 탄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과거 전문예인유랑집단으로써 이름을 날리던 남사당에서 잔뼈가 굵은 20대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한때는 판이 벌어지면 온갖 귀염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몇몫의 놀이채를 받던 재간동이들이었으나 세상은 변했고, 더 이상 판은 벌어지지 않았고, 배운 것이라고는 판놀음 밖에 없는 그들이 어른이 된 것이다. 이들이 뭉쳐서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굿판을 벌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사라져가는 굿을 살리기 위한, 그리고 그들이 놀아야 될 굿판을 스스로 찾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는 이러한 만남을 가능케 한 조건입니다. 당시 국악예고에 같이 재학하고 있던 시절에 그들은 서로를 알아나가면서 전통예술 재창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열정을 불태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뼛속깊이 체득한 전통적인 가락을 시대에 맞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웃다리 풍물'이라는 작품으로 최초의 결실을 맺게되며 1978년 2월, '공간사랑'에서의 첫 번째 공개 연주회에서의 대중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초기의 멤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김용배, 최종실, 김덕수, 이광수의 구성이 아니라 최태현, 김덕수, 김용배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좀더 전문적인 기능을 추구하고자 멤버를 교체하게 됩니다(이후 '호남 우도굿', '영남 농악'을 잇따라 발표하며 열광적인 호응을 받은 바 있습니다). 어쨌든 그 후로 사물놀이는 새로운 음악으로써 국내는 물론 전세계로 발돋음 하여 찬탄과 감동을 자아내며 그 저변을 확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물놀이가 전통예술을 재창조하는 데 있어서는 몇가지의 인식상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 마당판에서 연희되던 풍물굿을 무대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전통적으로 열린 공간에서 행해지던 풍물굿이 '놀이'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면 사물놀이는 그것을 좀더 예술적으로 집중화된 형태고 전환시켰습니다.


둘째 : 따라서 사물놀이에서는 음악적 특성이 강조가 됩니다. 각 레파토리들은 일정하게 짜여진 형태로 연주되며 연주시간 또한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습니다(물론 연주자의 기량이나 연주장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셋째 : 지방이나 전승자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전해 내려오는 가락이나 춤사위 등에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덧붙여지는 식으로 변화 되어왔던 풍물굿이 가락의 해체, 재조립 등의 과정을 통해 전면적인 재창조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가. 사물놀이의 사상


무릇 모든 예술의 목표는 '진정한 인간성의 구현'이라 생각합니다. 예술적 표현이니 예술적 감동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성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 사상누각에서 출발하거나 허황된 것, 혹은 탐욕이나 이기심을 목표로 해서는 안된다고 인류의 역사는 웅변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 민족고유의 정신세계에서 출발하는 사물놀이는 전통적인 古來의 사상들에 깊게 뿌리박고 있습니다. 사물놀이 공연시 무대 한켠에 , 혹은 중앙에 위치하는 낭대는 그러한 사물놀이의 사상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 낭대의 의미를 파악하므로써 우리는 그 사상에 좀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에는 "각 소국에는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라고 하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겼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소도라고 하는 것은 '신성함'을 상징하며 신과 접하는 통로가 되어 이것이 신성한 지역을 또한 상징하여 온 것입니다. 여기에 큰 나무를 세웠던 것이 지금의 '솟대'가 된 것이고 그것은 윗부분에는 새를 앉히고 밑으로는 땅을 지주 삼는 막대기 형태로 변화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솟대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은 사실 우리 민족 전래의 사상인 삼재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써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온전히 조화됨으로써 우주와 하나가 되어 널리 평화로움을 전파하고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경지야말로 우리 민족정서,민족예술의 정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사물놀이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꽹과리, 징, 장구, 북, 인간, 그리고 하늘과 땅은 서로 얽히고 섥혀서 일종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악기의 특성상 금속성 악기인 꽹과리(하늘로 품겨져 올라가는 소리를 내므로)와 징은 바로 하늘을 상징합니다. 무겁고 깊은 소리를 가지고 있는 북과 또 하나의 가죽 악기와 장구는 땅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인간이 다루어 조화시켜서 하나의 조화된 경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 호흡에 대하여


사물놀이를 구성하는 주된 방법론은 바로 '호흡'이라는 개념인데 실제로 이것은 방법론에 그치지 아니하고 사물놀이의 사상적 측면에 이르기 위한 주된 개념으로 됩니다. 호흡이란 그 개념 그대로 풀이하자면 '호흡이란 어떠한 장단의 합당한 몸의 움직임과 마음쓰기' 다시말하면 '호흡이란 어떠한 장단이나 가락에 잘 어울린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공(氣空)이나 단(丹)에서 이야기하는 호흡법은 수련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으로써 그것을 점점 단련하여 호흡으로써 기(氣)를 운용하고 우주의 이치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며, 사물놀이에서의 호흡은 간단히 말해서 '그 가락에 맞는 몸쓰기와 마음쓰기를 통하여 가장 알맞는 예술적표현을 하는것'입니다. 물론 둘 다 정신적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하는 호흡법이 조금 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반면 사물놀이에서 말하는 호흡은 실제 연주에 적용되는 면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쓰기'란 바로 '신명'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흡을 충실히 지켜나가면서 연주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에서 '신'을 내려는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계적인 재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올바른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 것이며 또한 관중과의 교감을 일으켜 그들과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사물놀이에서의 호흡은 '둥글게 감아간다' 혹은 '쌓아간다'는 개념으로 풀이 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음악이 건축적이고 입체적인 반면에 동양의 음악은 선적이고 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음악은 정중동(靜中動)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수직적인 움직임의 음악입니다. 예를 들자면 현악기의 농현처럼 한 음이나 그 호흡자체가 탄력적인 용솟음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성악에서 한 음을 낼 때 매우 수평적으로 정확하게 내주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인 점입니다. 우리음악은 그 탄력적인 용솟음(수직적 움직임)은 '감아준다'라고 표현되며 또한 그것은 원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한 호흡을 계속적으로 축적시켜나가며 예술적인 표현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물놀이에서 이야기하는 호흡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장단을 다스리고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사람들과(관객들과) 하나되고자 하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굿정신'에 맞닿아 있으며 그러하기에 사물놀이의 정신시계를 구성하는 기본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다. 사물놀이의 여러 가지 모습들


사물놀이는 풍물굿의 여러 측면을 종합, 재정리하여 그것을 4개의 레파토리로 만들었습니다. 초기에는 각 지방의 풍물굿들을 개별적으로 정리하는 형태였으나 점차로 비나리, 삼도설장구, 삼도농악, 판굿의 4가지 연주곡목으로 간소화되었습니다.


가) 비나리


비나리는 사물의 가락 위에 축원과 고사덕담의 내용을 담은 노래를 얹어 부르는 것인데, 한마디로 제의성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비나리는 사물놀이의 공연에서 맨 앞에 놓여집니다. 즉 비나리로써 공연의 문을 열어서 오신 분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마침내 연주자와 관객사이의 벽을 서서히 걷어내고 하나로 어우러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하늘과 땅에 알림으로써 일종의 터를 다지는 것입니다. 비나리는 경기지방의 사설을 바탕으로 다시 짜여졌고 그 내용은 무릇 모든 이들이 잘되게 하는 그러한 것으로 채워져 있으며 창세내력, 살풀이, 액풀이, 축원덕담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 삼도 설장구 가락


삼도 설장구 가락은 호남, 영남, 경기-충청의 장구 명인들의 가락을 한데 모아 새롭게 짠 것입니다. 원래 설장구라 함은 판굿이 끝나고 개인놀이를 할 때 특별히 장구에 능한 상장구나 그 밖의 장구잽이들이 한명, 혹은 여러명이 나와 자신의 기예를 마음껏 뽐내던 것을 일컫는데 사물놀이는 이를 무대화하여 음악적으로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연주자들의 호흡을 한껏 끌어올려 신명을 다져나가는 '다스름', 고요한 평정의 상태에서 가락을 감고, 풀고, 몰아치는 다양한 흐름이 있는 '굿거리', 어깨춤 들썩이는 넉넉함으로 이루어내는 '덩덕궁이', 여유와 건들거림이 멋지게 조화되어 있는 '동살풀이', 불꽃처럼 격하게 타오르다가 다시 평온함으로 마무리되는 '휘모리'까지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변화는 연주자들 뿐 만 아니라 보는 이들까지 무아의 경지로 휘몰아 갑니다.


보통 사물놀이 연주자들의 가락은 호남의 김만석선행, 전사습 선생, 영남의 조판조 선생, 그리고 남사당의 양도일 선생의 가락을 기본으로 짜여져 있고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다른 가락들이 덧붙여지곤 합니다.


다) 삼도농악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사물놀이의 모습이 이 '삼도농악'에 담겨 있습니다. 각 악기의 개상과 조화가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호남우도가락', '영남농악', 그리고 '웃다리풍물'을 토대로 짜여져 있습니다. 오채에서 질굿 - 굿거리 - 양산도 - 덩덕궁이에 이르는 유장한 흐름은 호남우도의 것이고, 활달하고 남성적인 별달거리, 구음 등은 영남지방의 농악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자진가락에서 짝쇠로 이어지는 경쾌하면서도 화려한 연주는 바로 웃다리 농악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탕위에서 쇠와 가죽이 서로 경연하며 밀고, 당기고, 모이고, 흩어지는 다채로운 연주와 절묘한 호흡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삼도농악'이 지금껏 대중의 많은 사랑을 독차지해온 이유라 할 것입니다. 특히 자진가락 - 짝쇠로 이어지는 격렬한 에너지의 분출은 앉은반 사물놀이의 모든 예술성이 집대성된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것입니다.


라) 판굿


본래 판굿이란 대보름, 정월초하루 같은 절기에 풍물패가 집집마다 지신밟기를 하여(이것은 대개 며칠씩 계속된다) 마을의 신명을 엮어낸 다음 마지막날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 판의 신명나는 굿을 이루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판굿에서는 음악적인 측면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놀이성이 강조되며, 풍물의 온갖 기예와 보는 이들이 흥에 겨워 내지르는 소리, 구경꾼과 예인(藝人)이 너나없이 흐드러지게 어울리는 춤판,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져 한 무리의 엑스터시로 승화되는 것이다. 사물놀이의 일반적인 형태는 역시 4인의 구성과 4개의 악기이며 웃다리농악을 기본으로 하는 판제를 보여줍니다. 웃다리의 종이부포와 호남의 털부포가 결합된 상쇠의 부포놀음, 장고의 넘실거리는 춤과 가락, 북의 무거운 소리와 어깨춤, 징의 깊은 음과 삼도의 상모놀음을 다 섭렵하여 그를 재정리한 상모놀음으로 앙상블을 만들어냄으로써 풍물기예의 결정판과도 같은 종합예술을 선보입니다.

1978년 2월, '공간사랑'이라는 조그만 공간에서 출발한 사물놀이는 지난 20년간 '우리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잊혀졌던 민족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되찾아 오는데 성공했으며 더불어 '아버지 뻘'이라고 할 수 있는 풍물굿이 다시한번 융성하게 했으며 그것이 현대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약 20여년의 역사 속에서 이제 사물놀이에 대한 검토, 평가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의 평가가 제출되었고 수많은 논의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모든 토론들을 지면에 옮길 수는 없겠지만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또 빈번하게 돌출되었던 몇가지의 그릇된 오해들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가. 사물놀이가 풍물굿을 '음악'으로 한정시켰다는 견해에 대해


사물놀이는 기나긴 여정의 시작을 '웃다리풍물'로 대신하였습니다. '웃다리풍물'은 사물놀이의 '풍물굿의 현대화' 모색작업의 최초의 성과로서 마당판에서 연희되던 종합예술인 풍물을 무대로 끌어올려 음악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속에서 풍물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인 발림, 사설, 잡색, 대동굿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물놀이를 비판하는 이들은 흔히 '대동적인 신명성과 종합예술적인 풍물의 모습'을 거세시켰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고의 뿌리부터 잘못짚은 견해입니다. 사물놀이의 출발은 누가 뭐라해도 '무대예술'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내에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 강조하겠다는 의도가 포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음악적인 부분만을 강조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흡사 민속적인 요소를 포함시켜 작곡한 교향곡에 대하여 '민속적인 요소가 전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조건에 맞는 방법과 특성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풍물굿은 풍물굿대로, 사물놀이는 사물놀이대로 발전의 전망을 생산해야지 서로의 방식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후의 사물놀이의 레파토리에는 '판굿'이 추가되어 무대예술로써의 완결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 소위 '정통'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하여


사물놀이에 대한 편견들의 문제점은 그것이 전혀 본질적인 부분에 맞닿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통인가, 아닌가'하는 부분은 그것이 창작음악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 먼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물놀이의 경우 전통예술에 대한 보존과 함께 '현대화'  또한 수행했기 때문에 정통성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도대체 지금 이 시기에 정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 그것 자체가 의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제시대와 근대화시기라는 두 번의 단절기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의 우리가 전통을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의 단절기는 엄혹한 현실속에서 수많은 명인들이 외롭게 죽어가야 했고 수많은 춤과 노래와 풍물굿이 사라져가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전란을 거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이란 옛 예인들의 영광의 발자취와 그들의 그림자였을 따름입니다. 흡사 잃어버린 역사의 페이지처럼 그 비어있는 부분을 우리가 연구하고 궁리하여 채워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전통과 계승, 그리고 그 현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그 안에서 한국적인 것, 한국적인 정신, 민족적 형식들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 사물놀이가 너무 빠른 가락을 연주한다는 데 대하여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옛 말을 떠올리게 하는 단선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물가락을 원래의 풍물가락에 흡사하게 맛낼 것 다 내면서 연주한다고 해봅시다. 어떤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사람들이 그 가락에 도취되어 신명을 내고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반대의 경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물놀이가 '개발'될 때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복잡한 산업사회(이제 곧 정보화사회로 진입한다고 하는)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정서,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음악은 조금씩 빨라져 왔습니다. 지금 다시 느린 음악으로 회귀하자는 말은 일면적으로는 타당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무대예술화 되어있는 사물놀이에 대해서는 요구할 수 없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예술에 있어서 완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지난 20여년간 사물놀이가 대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현대사화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에 사물놀이의 내용과 형식을 더욱 발전시켜야 함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는 과거와 현재의 역동적인 상호작용과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제 새로운 세대들이 그 새로운 변화의 내용을 이끌어내야 할 것입니다.


가. 전통을 철저히 지켜나가면서 당대성에 천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놀이가 대중적인 호응을 받음과 동시에 음악적으로도 성공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합니다. 사물놀이의 4가지 레파토리는 더 이상의 덧붙임이나 음악적 변형이 필요없을 정도로 정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음악적 구조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틀이 풍물굿의 기본구조를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삼도농악'의 경우 오채 - 좌질굿 - 우질굿 - 풍류 - 굿거리 - 덩덕궁이의 흐름은 호남우도 농악의 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마당일채 - 자진가락 - 짝쇠의 흐름은 또한 경기 - 충청가락의 기본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비나리'는 경기제 비나리를, '삼도 설장고'는 글자그대로 각 지방의 장구의 명인들의 가락을 현대적으로 재정리한 것이고, '판굿' 또한 웃다리 판굿을 기본으로 하여 조화롭게 꾸민 것입니다.


그 반면에 풍물굿의 내고 - 달고 - 맺고 - 푸는 구조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올려서 '현대성'을 갖게 했습니다(이 부분은 김헌선씨가 「풍물굿에서 사물놀이까지」에서 '점층과 가속의 틀'이란 주제로 자세히 논구한 바 있습니다). 또한 스피드를 가미함으로써 복잡하고 빠른 현대의 정서를 반영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초기의 사물놀이를 보면 그다지 빠르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20여년동안 점점 앙상블이 중시되고 세련되어지면서 점점 빠른 속도로 변모해가는 것을 음반이나 비디오 테잎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이렇게 전통을 고수하는 상태에서만이 성공적인 창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나. 다시한번, 근본부터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예술에 있어서 어떠한 양식이든 탄생 - 발전 - 개화의 단계를 거쳐 매너리즘에 빠졌다가 다시 새로운 자양분(시대정신이든, 혹은 새로운 개념, 테크닉의 발달, 새로운 종합 등)을 얻어 미증유의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을 거칩니다. 만약 새로운 자양분을 얻지 못하면 그 장르 혹은 양식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해당 양식이 매너리즘의 단계에 이르면 초기의 활력과 신선함은 쇠퇴하고 본질은 희석된 채 과도한 장식만이 난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눈요깃거리나 그 밖의 화려한 '효과'를 덧붙이려는 시도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곁가지들을 무수히 늘린다고 해서 예술이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① 우선 우리의 '소리'를 찾는 것에 다시 한번 매진해야 합니다.


요즈음, 사물놀이가 '테크닉'으로만 이해되어 가락한번 더 집어넣는 것이 최고인양 여겨지는 그러한 풍토가 있는데, 이것은 '기본'에 대한 숙지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곧 무너지고 말 모래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꽹과리의 소리, 이것만 해도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징, 장구, 북의 소리는 또 어떠합니까? 어르신들이 풍물치는 소리를 들어보면 이 문제는 명확해집니다. 동네어귀에서 들려오는 기막힌 풍물소리에 반가와서 달려가보면 정말이지 '궁'이나 '따'소리 하나도 제대로 안 나는 노인분들이 치고있는데 그 소리가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고야 마는 신묘한 소리라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아직 어떠한 음향기기도 꽹과리소리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리는 아직 저 멀리에 있는 것입니다.


② 사물놀이와 여타의 풍물굿이 서로 교류, 장점을 흡수하며 하나가 되어 발전해야 합니다.


지금껏 사물놀이 연주자들과 사회단체, 혹은 지방의 굿쟁이들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일부는 서로 헐뜯고, 일부는 서로 무관심하거나 애써 무시하며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 왔습니다. 흡사 신은 하나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과 견해에 따라 그 신이 예수도 되고 석가도 되고 공자도 되고 알라도 되듯이 '굿'은 하나인데 그것을 행하고 바라보는 방법에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나누고, 경계하고, 결국은 그러면서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어왔습니다. 사물놀이와 풍물굿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사물놀이는 풍물굿의 발전단계 속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며 또한 발전을 일구어 낼 수 있는 토대인 것입니다. 서로 경원시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굿쟁이들의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풍물굿은 자신의 내부에 사물놀이의 방법론이자 사상으로서의 '호흡'과 '테크닉'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화와 세련미를 곁들이는 단계로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풍물굿은 커다란 역할을 해왔지만 현재까지 이어져내려온 풍물굿을 보존하기에 급급한듯한 인상입니다. 또한 풍물굿은 그것이 이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인가(과학적인 전수방법, 유통구조에 대한 고민등)에 대해 깊이 연구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물놀이 연주자들의 경우 기능수련에 매진한 나머지 잊기 쉬운 우리 조상님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민족 고유의 '굿정신'을 다시한번 가슴 속에 새기고 동시에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될 수 있는 '대동성(大同性)'을 가져나가는 데에 아낌없는 노력을 경주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 : http://www.jins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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